먹는 것에 이 정도로 진심인 자. 나는 나를 “먹보”라 칭한다.
밤 10시가 조금 넘으면 잠이 들고, 아침 6시가 조금 넘으면 잠이 깬다. 그렇게 새나라의 어린이같은 바지런한 하루를 시작할 때 곧잘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배고프다“ 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의 한끼도 거르지 않고 아침 식사를 먹었다. 어린 시절에는 친정엄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한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학교에 지각하더라도 아침은 거르지 않아야 한다는 엄마의 굳은 신념 덕분이었다. 나는 지각을 하면서도 아침밥을 먹느라 그런 것이라며 개의치 않는, 거진 당당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독립해 혼자 자취 생활을 할 때도, 결혼해서 신랑과 함께 지내면서도 아침 식사를 절대 거르지 않는다. 우리 집 아침식사 담당은 우리 신랑인데, 그가 출근 전날 삶은 계란, 사과, 포도, 방울토마토 등으로 구성된 아침 거리를 락앤락 반찬통에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어 둔 뒤 다음 날 출근할 때 챙겨주면, 회사로 가져가 출근 하자마자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그도 그의 아침 식사를 챙겨 출근해서 먹는다. 우리 두 사람의 아침 식사는 그야말로 신성한 의식이 되어 버렸는데, 이 시간 동안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를 채우고 삶의 행복도 함께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아침식사를 했는지 메신저로 안부를 묻는 것도 그 의식의 한 꼭지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평일에 아침 도시락을 챙겨 출근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침 식사를 거른다는 것이 오히려 있을 수 없는 삶이기에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다만, 아침밥을 포함해서 매 끼니에 진심을 다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특별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신랑과 친구들이 만날 때마다 자주 이야기하는 나의 대한 에피소드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먹을 것에 대한 고집이다.
1. 친구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혼집에 놀러갔는데, 떡볶이를 대접해주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별 뜻 없이 함께 먹을 양배추 샐러드를 만들어 갔다. 친구는 떡볶이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지만, 나는 떡볶이와 양배추 샐러드의 조합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 샐러드를 준비해서 함께 먹으면 조화로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내가 바리바리 챙겨 간 한 무더기의 양배추 샐러드를 보고 살짝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때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고마움의 다른 표현이겠거니(?) 정도로 생각했으려나.
2.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선을 넘었구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 방문했을 때였는데,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신랑에게 양배추를 썰어서 챙겨 와 달라고 했던 것 같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오더(?)를 접한 남자친구 입장에서도 얼마나 황당했을지 헛웃음이 나온다. 모든 식사에 충분한 섬유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천착되어있거나, 건강한 식단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시기가 아니었다 싶다. 더불어 샐러드를 따로 주문하는 것이 에라이 돈 아깝다 라는 내심의 의사도 반영된 것은 아닐지.
3. 나는 식사 한 끼 한 끼가 너무 소중해서 어느 한 가게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지 못한다면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쉽게 말하면 먹다가 나간다는 뜻이다. 혹자는 내가 재벌 3세라도 되나 싶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최근 수일 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예상했던 맛에서 전혀 벗어나 도저히 먹을 수 없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내 스스로도 내가 꽤나 특이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으니까 너무 비난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실제 에피소드로 다시 돌아가면,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신랑과 함께 마곡에 있는 일본식 롤 집에서 롤을 한 줄 사먹으면서, 국물 요리로 뼈해장국도 먹고 싶어 근처에 있는 뼈해장국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신랑은 그러지 말고 같은 가게에 있는 메뉴 중에 뼈해장국을 대체할만한 나가사키 짬뽕을 시키자고 했던 것 같다. 내가 먹고 싶다는데 왜 그러냐면서 화를 냈더니 신랑도 못 이기고 뼈 해장국 집으로 동행하여 남은 식사를 했다. 신랑도 마음이 상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밥만 먹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맞춰 가는 시기였는데, 우리 신랑은 나의 이런 기행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나 보다. 이 이야기를 가까이 사는 엄마에게 했더니, ”우리 소영이가 많이 힘들었나보다.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라면서 단번에 따뜻하게 받아주어서,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연애 초반에 노량진 푸드트럭 중에 타코야끼를 파는 곳이 있었는데, 밤 10시가 다 되었지만 꼭 먹고 싶어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신랑에게 노량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집 타코야끼가 먹고싶다고 했다가 단칼에 “지금은 문 닫았을 거야” 라면서 거절하는 그를 원망하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노량진에 내려서 확인해봤지만 이미 트럭 문은 닫혀있었다.
힘든 마음, 스트레스 받는 상황을 맛있는 걸 먹으면서 날려보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데, 나 조차도 내가 그런 사람인 걸 뚜렷하게 알지는 못해서 신랑에게 설명을 잘 해주지 못했다. 여하지간에 그 사건이 우리 신랑에게는 꽤 효과가 좋은 충격요법이었던 것인지 그 이후에는 한번도 나의 기이한 메뉴 선택 행태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4. 신랑이 나의 먹심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즈음, 함께 신촌에 있는 닭갈비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닭갈비를 쌈 싸먹을 수 있는 채소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닭갈비를 먹으면서 쌈채소를 곁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내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멘붕에 빠진 나를 알아 본 우리 신랑은 직원분에게 채소 제공이 가능한지 물어본 다음, 그 가게에서는 제공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혹시 근처 마트에서 쌈채소를 사 와 함께 먹어도 될지 물었다. 다행히도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신랑은 즉시 근처에 있는 작은 마트를 찾아 쌈채소를 품고 돌아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맙고 사랑스럽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꽤나 값이 나가는 타코를 식사 메뉴로 골랐는데, 아주 형편없는 맛이어서 신랑이 대신 다 먹어주고 나는 회전초밥집에서 혼자 4접시 정도를 먹고 식사를 마무리 했던 적도 있다. 신랑은 그 타코도 맛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에게 한 끼 식사가 충족시켜야 하는 맛의 레벨이 1부터 10의 척도를 기준으로 최소 8 정도 되어야 한다면, 신랑은 5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잘 먹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 내가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음식도 곧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 매번 놀랍고 신기하다.
내가 왜 이렇게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지 그 원인과 배경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유력한 학설이 있다. 어렸을 적 집안 형편상 무언가 먹고 싶어도 먹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는 일찍 철든 아이가 이제는 먹는 것 만큼 양보할 수 없는 철 없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먹는 걸 잘못 먹어 탈이 난 적이 여러 번 있다보니 최대한 건강한 메뉴를 먹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작은 위장 때문에 많은 양을 먹지 못하는 만큼, 최소한의 양으로 최대한의 만족감을 얻으려는 경제적 판단일 수도 있겠고, 특별히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없다 보니 먹는 것으로 푸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에게 먹는 시간, 그리고 메뉴는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오트밀을 먹고 있다. 맛있다.
* 내가 최근 들어 좋아하는 메뉴는 샤브샤브, 편백찜, 스키야끼와 같은 고기와 채소가 적절히 조화된 음식, 구운 치킨과 양배추 샐러드, 견과류가 든 오트밀.